비즈니스 컨설팅을 하다 보면 정교하게 설계한 시스템이 단 하나의 변수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인천 서구에서 한 제조 기업의 디지털 인프라 개편을 자문하던 중 예측 불가능한 내부 오류가 터졌을 때, 저도 처음엔 매뉴얼대로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던 순간의 서늘함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보는 내내 되살아났습니다.

어쩔수가 없다, 구조조정이라는 도끼질이 완성한 몰락의 서사
직접 겪어보니 조직에서 핵심 인력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잉여 자산으로 분류되는 속도는 놀라울 만큼 빠릅니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20년 넘게 태양제지에 몸을 바쳐 이른바 펄프맨상까지 받은 유만수는, 미국계 사모 펀드가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구조조정의 1순위가 됩니다.
여기서 사모 펀드(Private Equity Fund)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비용을 절감하고 재매각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자본 운용 방식을 말합니다. 인건비가 높고 나이가 많을수록 가장 먼저 도끼를 맞는 구조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수의 경력이 길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를 표적으로 만들었고,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냉정하게 응시합니다.
그가 3개월간 필사적인 구직 활동을 이어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절뿐입니다. 제가 자문 현장에서 수십 명의 실직 임원들을 만나보았을 때도 느낀 건데, 경력이 길수록 재취업 시장에서 오히려 문이 좁아지는 현실은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장년 구직자의 재취업 소요 기간은 20대의 두 배 이상에 달한다는 통계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바닥까지 내려간 만수는 결국 허위 구인 광고라는 변칙 카드를 꺼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제지 회사 이름으로 채용 공고를 내고,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수집해 등급을 매기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영화의 블랙코미디적 핵심 설정인데, 실소와 오한이 동시에 밀려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블랙코미디의 외피 안에 담긴 미장센의 건축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박찬욱 감독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만수의 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단순히 예쁜 화면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간의 구조가 인물의 심리와 운명을 설명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세트, 인물의 위치, 색감까지를 통칭하는 영화 연출 개념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건축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 미장센을 특히 공간과 건축의 언어로 구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만수의 집, 경쟁자들의 공간, 그리고 마지막 불 꺼진 자동화 공장이 각각 다른 서사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연기는 이 모든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만수는 카리스마와 취약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입니다. 압박이 가해질 때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무너지면서도, 그 동기만큼은 이해 가능한 선을 유지합니다.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 캐릭터는 그냥 불쾌한 인물로 끝났을 겁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남편의 의심과 폭력 속에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가족의 운명을 조율하는 인물로, 대사 한 줄 한 줄에 치밀한 밀도가 담겨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에는 전통적인 아내 역할처럼 보이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존재감이 역전됩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이 연기한 조연들도 짧은 등장 안에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 인물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구범모: 알코올 중독으로 무너진 상태이지만 아내와의 몸싸움 장면에서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흐르는 연출이 블랙유머의 정점을 찍습니다.
- 고시조: 일본 제지업계 경력을 가졌음에도 구두 가게 점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로, 만수와의 대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고 동시에 잔인한 순간입니다.
- 최선출: 현재 잘 나가는 제지 회사 반장이지만, 그와 함께하는 음주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남을 만한 리얼한 만취 연기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AI 자동화 시대가 완성한 공허한 승리와 개연성의 허점
영화의 마지막 장면, 로봇이 종이를 옮기는 불 꺼진 공장에서 만수가 이겼다고 쾌재를 부르는 장면은 뼈 아프게 슬픕니다. 수많은 사람을 짓밟고 꿰찬 자리가 결국 사람이 필요 없어진 공간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응축합니다.
여기서 AI 자동화(Automation)란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반복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을 뜻하는데, 제조업 현장에서 이 흐름은 이미 수년 전부터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제조업 분야의 산업용 로봇 밀도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노동자 1만 명당 로봇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만수가 도달한 공장은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만 비판적으로 바라볼 지점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실의 수사 시스템은 영화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연쇄적인 제거 과정에서 아마추어 살인마가 아무런 법적 패널티 없이 최종 면접장까지 직진하는 전개는, 이야기의 속도감을 위해 개연성을 일정 부분 희생한 것입니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경찰이나 이웃의 수사망이 너무 소박하게 처리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또 한 가지, 극 중반부에 삽입된 가상의 VPN 서비스 광고 장면은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긴장감을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실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이런 PPL(Product Placement, 영화 속 제품 노출 광고 기법)이 서사의 흐름을 끊으면 관객이 다시 몰입을 회복하는 데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립니다. 장르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에서 이 선택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어쩔 수가 없다는 자본주의의 도끼질이라는 시대적 공포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가장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 중 하나입니다. 불 꺼진 공장에서 혼자 서 있는 만수의 얼굴은, 관객 각자에게 다른 무게로 꽂힐 겁니다.
우리는 왜 직장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을까요. 영화는 그 질문을 끝내 답하지 않고 스크린 너머로 던집니다. 몇 가지 아쉬운 지점을 안고도,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오래도록 무거웠습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극장에 갈 이유가 됩니다. 개봉 중이라면 꼭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