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Black List)에서 1위를 차지한 각본이 6년 만에 스크린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블랙리스트란 매년 제작되지 않은 최고의 시나리오를 선정하는 업계 공인 랭킹 시스템으로, 이 목록에 오른 각본은 제작 전부터 완성도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2025년 8월 개봉한 영화 릴레이(Relay)가 바로 그 작품입니다. 저도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개봉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기대 이상인 부분도, 아쉬운 부분도 동시에 있었습니다.

릴레이, 내부고발자를 지키는 그림자, 애쉬의 보안 전략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 애쉬가 자신의 신원을 절대 드러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그는 통화 중계 서비스(Relay Center)를 핵심 통신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통화 중계 서비스란 발신자의 목소리 대신 제3의 중계자가 문자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통화 내용을 도청하더라도 발신자의 실제 목소리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익명 통신 기법입니다. 감시자들이 중계 서비스 센터까지 찾아가는 장면에서 애쉬가 이 방법을 쓴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저는 그 장면이 꽤 실감났습니다.
실제로 제가 인천 서구에서 제약·바이오 기업의 내부 비자금 감사 프로젝트를 자문할 때도, 정보 보안의 첫 번째 원칙은 통신 경로를 노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을 숨겨도 '누가 누구에게 연락했는가'라는 메타데이터(Metadata)가 새어나가면 감시망에 포착됩니다. 메타데이터란 통신 내용 자체가 아니라 발신자, 수신자, 시간, 위치 등 통신 행위를 둘러싼 부가 정보를 말합니다. 애쉬가 중계 서비스를 고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이 설정은 현실적인 보안 논리와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또 하나 눈에 띈 건 소포 배송 추적을 무력화한 방식입니다. 애쉬는 사라가 공항 보안 구역에서 소포를 발송한 직후, 우편물 서비스의 주소 변경 기능을 활용해 도착지를 바꿔버립니다. 변경된 주소가 기존 송장(Tracking Number)과 연동되지 않는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송장이란 배송 물품을 추적하기 위해 부여되는 고유 번호로, 이 번호로 물품의 이동 경로를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습니다. 감시팀이 두 우체국을 헛걸음하는 장면은 이 허점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꽤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반전 플롯이 주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서사의 빈틈
사라의 정체가 드러나는 후반부 반전은 분명히 강렬합니다. 처음부터 조직의 핵으로 접근했던 사라가 애쉬의 아지트 인프라 전체를 털기 위해 '여리고 순진한 내부고발자' 페르소나를 연기했다는 설정은, 영화 전반부의 모든 장면을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솔직히 꽤 놀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자문 현장에서 가장 경계해 왔던 유형이 바로 이런 내부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 신뢰를 먼저 쌓은 뒤 조직적으로 정보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심리적 조작 기법을 말합니다.
다만 반전의 충격은 크지만, 그 논리적 토대가 다소 약하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라가 서류 일부를 빼먹는 실수를 일부러 저질러 애쉬를 끌어내려 했다면, 그 계획이 너무 우연에 기대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기만적 접근은 반드시 다중 검증 루트(Verification Route)를 설계해두는 법인데, 영화에서 사라의 팀이 단 하나의 실수 유도에만 의존한 것처럼 묘사된 부분은 내러티브의 빈틈으로 남습니다.
경찰 워렌이 문자 한 통을 받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해 일당을 일망타진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의 완급 조절보다 결말의 속도감을 우선시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웰메이드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이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각본의 완성도 문제라기보다 편집 단계의 판단 실수에 가깝습니다.
애쉬의 서사 흐름에서 주목할 만한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통화 중계 서비스 활용으로 발신자 추적 원천 차단
- 송장 주소 변경을 통한 소포 추적 무력화
- 감시자 얼굴 수집을 위한 공항 미끼 작전
- 아지트 내 사전 설치된 탈출 트랩(함정 프로토콜) 가동
노드 VPN 광고 삽입, 이건 솔직히 실패한 연출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장면은 애쉬가 비밀 금고에서 옵티머 제약의 비리 보고서를 암호화하는 긴장감 넘치는 시퀀스 도중에, 느닷없이 노드 VPN(NordVPN) 광고가 삽입된 부분이었습니다. VPN(Virtual Private Network)이란 인터넷 접속 시 사용자의 실제 IP 주소를 숨기고 데이터를 암호화된 가상 터널을 통해 전송하는 기술로, 온라인 익명성과 보안을 강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영화의 주제와 완전히 무관한 기술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삽입 방식입니다. 서버 수, 다크웹 모니터링 기능까지 카탈로그식으로 나열하는 PPL(Product Placement)은 하이콘셉트 스릴러의 서스펜스 호흡을 완전히 끊어버립니다. PPL이란 영화나 드라마 안에 특정 제품이나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간접광고 기법을 말합니다. 영화의 세계관과 자연스럽게 녹아들면 오히려 몰입을 높이기도 하지만, 이번처럼 장면이 전환되듯 갑작스럽게 삽입되면 관객을 유튜브 광고 스킵 상황으로 끌어내립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실소가 먼저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외 OTT 플랫폼에서 간접광고 규정이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방송 콘텐츠의 간접광고는 프로그램 시간의 5% 이내로 제한되며, 시청자의 시청 흐름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삽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방송과 다른 기준이 적용되지만, 적어도 이번 릴레이의 VPN 광고는 그 선을 훌쩍 넘은 수준이었습니다.
애쉬가 결국 혼자였던 이유, 그리고 영화가 남긴 질문
애쉬가 긴 시간 동안 철저하게 혼자 이 일을 해온 이유는 후반부에 가서야 납득이 됩니다. 과거 실적 압박에 시달리며 알코올 의존증(Alcohol Dependence)에 빠졌던 그는 사람들을 속여 실적을 냈고, 비리를 묵인하며 살아왔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이란 음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심리적·신체적으로 알코올에 종속된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한 술꾼 설정이 아니라, 그가 시스템의 공모자였다가 속죄하는 과정의 핵심 장치입니다.
제가 컨설팅 현장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때가 있습니다. 신뢰했던 내부 임원이 핵심 데이터를 경쟁 카르텔에 넘기려 했던 그 순간, 시스템과 규칙이 얼마나 얇은 방패인지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애쉬가 사라의 허술한 실수 앞에서 원칙을 깨고 직접 뛰어든 결정은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저는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무너지는 건 항상 논리가 아니라 감정입니다.
2025년 국내 기업 내부고발 신고 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공익 신고 접수 건수는 매년 10% 이상 늘고 있으며, 신고자 보호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영화 릴레이가 단순한 첩보 스릴러를 넘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거대 조직의 압력 앞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몇 가지 아쉬운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릴레이는 올해 개봉한 첩보 스릴러 중에서 가장 촘촘한 두뇌 게임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반전의 충격이 식고 나서도 애쉬가 마지막으로 걸어 나가는 장면의 여운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기업 비리나 내부고발 소재의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완급 조절의 아쉬움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마지막 반전을 모르고 보시는 걸 강하게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