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약한 몸으로 산소통에 의지하면서도 불의 앞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70대 할머니가 총을 들고 악덕 개발업자와 부패한 경찰을 상대로 정면 돌파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현장에서 마주했던 어떤 노인들의 눈빛이 겹쳐 보여서 편하게 보질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 거대 자본이 시스템을 해킹하는 방식
비즈니스 컨설팅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된 지역에 외부 자본이 유입되어 개발이 진행되면서 원주민과 기존 소상공인이 점진적으로 밀려나는 도시 재편 현상을 말합니다. 거창한 명분 뒤에 가려진 현실은 늘 같았습니다. 평생을 일궈온 터전을 빼앗기는 쪽은 항상 약자였고, 그 과정은 철저히 합법의 외피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 빌런 듀크가 정확히 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댐 건설과 리조트 개발이라는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마을 주민들의 땅을 하나씩 잠식해 나가고, 거부하는 이들은 자살로 위장한 연쇄 살인으로 제거합니다. 더 냉혹한 지점은 그 다음입니다. 경찰서장 윈스턴이 듀크의 돈에 매수되어 공권력 자체가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 장면은 저도 현장에서 비슷한 구조를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묘하게 피부에 닿았습니다.
무단 주거침입을 저지른 듀크의 부하는 보석(bail)으로 풀려나고, 피해자인 앨런은 오히려 유치장에 갇히는 역전된 법의 작동 방식은 단순한 영화적 과장이 아닙니다. 보석이란 피의자가 일정 금액을 담보로 납부하고 재판 전까지 석방되는 제도인데, 자본이 충분한 쪽은 이 제도를 방패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건드리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스템은 중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 전직 KGB 킬러라는 설정이 단순한 킬링타임이 아닌 이유
영화 후반부, FBI 데이터베이스 조회를 통해 앨런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러시아어로 '칼과 방패(Sword and Shield)'를 의미하는 문신, 즉 KGB(Komitet Gosudarstvennoy Bezopasnosti,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출신의 전직 전문 킬러라는 사실이 드러나죠. KGB란 냉전 시대 소련의 정보기관으로, 첩보·암살·공작을 담당하던 세계 최고 수준의 비밀 조직을 말합니다.
이 설정이 단순한 액션 영화의 흥미 요소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앨런이 집을 지키려는 이유는 자산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대사 한 줄이 전부를 설명합니다. 어릴 적 길거리에서 거두어져 살인 도구로 훈련된 사람이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공간, 그것이 비호른 릿지의 그 집입니다. 여기서 저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노년 액션이라는 장르적 포장 안에 정체성과 귀속감의 문제가 이렇게 진하게 녹아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타이타늄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은 몸으로 정예 용병들을 제압하는 장면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그 과장된 액션이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앞서 쌓인 서사가 그 무리함을 감당해내기 때문입니다. 린 샤예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그 균형을 잡고 있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인시디어스 시리즈의 영매 캐릭터로 친숙한 그녀가 이번에는 살벌한 전술 전문가로 변모하는 낙차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영화가 선보이는 앨런의 전술적 강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거주 공간의 지형지물을 활용한 근접 전투(CQB, Close Quarters Battle) 능력
- 심리전과 협상 카드를 동시에 운용하는 정보기관 출신 특유의 복합 전술
- 에비와의 역할 분담을 통한 양동작전(댐 폭파 + 정면 교전 분리)
## 플롯의 구멍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문제
제 경험상 장르 영화를 분석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습니다. 재미있으면 모든 게 용납된다는 착각입니다. 이 영화는 중반부터 플롯 홀(plot hole), 즉 서사 내부의 논리적 결함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세계 최상급 킬러 출신의 클레이가 시골 경관 다르브 한 명을 인질로 잡아 앨런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장면은 인위적인 긴장 조성을 위한 억지 전개로 보입니다. 클레이의 능력치를 감안하면 앨런을 직접 제거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텐데, 서사가 필요로 하는 위기 상황을 만들기 위해 캐릭터의 판단력을 낮춰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후반부 숲 속에서 정부 권력자들이 등장해 듀크를 조용히 인도해가는 장면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복잡하게 얽힌 서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전능한 존재나 장치로 결말을 처리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사법적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해피엔딩으로 직행하는 이 선택은, 영화가 초반부터 공들여 쌓아온 시스템 비판의 무게를 스스로 가볍게 만들어버립니다. 저도 이 부분은 좀 아쉬웠습니다. 그 긴장감을 다른 방식으로 풀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남습니다.
에비가 아버지의 캠핑카에서 유품을 발견하며 눈물 흘리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부장적 오해와 화해라는 클리셰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독립적인 캐릭터로 출발했던 에비가 후반부에는 기성 드라마의 문법 안으로 수렴되어 버립니다. 영화 전반의 신선함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더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실제로 미국 영화 산업의 장르 편의주의 경향은 연구로도 확인됩니다. 복수극과 스릴러 장르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식 결말 처리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서사 구조 측면에서 꾸준히 지적받아 왔으며 이는 제작비 대비 흥행 안전성을 우선시하는 구조적 압력에서 비롯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 거대 자본에 맞선 개인의 존엄, 그 영화적 울림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의 무게는 결국 젠트리피케이션과 자본 폭력이라는 현실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과거 서구 자본이 유입되어 수십 년을 버텨온 소상공인들의 터전이 허물어지는 현장을 직접 자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부하는 노인들의 처절한 눈빛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앨런이 듀크를 향해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집은 팔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제가 특별히 흔들렸던 건 그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개발 사업에 의한 원주민 강제 이주는 지속적인 사회적 쟁점입니다. 주거권과 재산권 침해 사례는 꾸준히 보고되고 있으며 자본과 공권력의 결탁 구조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존 윅이 반려견 한 마리를 잃은 것을 계기로 시스템 전체와 맞섰듯, 앨런 콜은 평생 처음 가져본 집 한 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과거를 꺼내듭니다. 그 설정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밀어붙인 영화입니다. 플롯의 빈 곳은 분명히 있지만, 그 빈 곳을 린 샤예의 눈빛과 캐릭터의 서사적 진정성이 상당 부분 채워냅니다.
주말 밤 묵직한 메시지와 거침없는 액션을 동시에 원하는 분들께, 일단 한 번 틀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단, 플롯의 편리함에 민감한 분이라면 후반부에서 약간의 인내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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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youtu.be/hr93dWvLIxY?si=ObxwDQrQbSfyC1V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