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보다 무거운 빚이 있습니다. 상장이나 메달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종류의 것. 저는 몇 년 전 채무 방어 프로젝트를 맡아 인천 서구의 한 제조업체 자문을 진행하던 중,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서 동료를 살리기 위해 기득권을 내던진 경영자의 결단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때의 서늘한 기억이 영화 가이 리치 더 커버넌트를 보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이 리치 더 커버넌트,브라더후드: 국적도 언어도 없는 신뢰의 회로
일반적으로 전쟁영화는 영웅 서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진짜 인상 깊은 작품은 영웅이 아니라 신뢰를 다룹니다. 이 영화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미 육군 상사 존 킨리가 이끄는 특수부대는 탈레반의 IED 제조 거점을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IED(Improvised Explosive Device)란 급조폭발물, 즉 전선이나 압력판 같은 간단한 장치로 만드는 비정규 폭발물을 의미합니다. 정규군의 지뢰와 달리 매설 위치를 예측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현대 전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무기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임무에 새로 합류한 통역사가 아흐메드입니다. 그는 탈레반에 의해 아들을 잃은 인물로, 돈이 아닌 복수심과 생존 본능으로 이 지옥의 회로 속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아흐메드가 정보상 하디의 안내 경로를 의심하며 차량을 세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길로 안내할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그의 말 한마디가 8명의 목숨을 살립니다.
브라더후드(Brotherhood)란 단어는 보통 전우애 정도로 번역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보다 훨씬 밀도가 높습니다. 국적도, 언어도, 계급도 다른 두 사람이 목숨을 공유하는 순간 형성되는 인간 본능적 유대 관계에 가깝습니다. 아흐메드는 부상 입은 존 킨리를 나무 카트에 실어 험준한 지형 100km를 홀로 돌파합니다. 이건 영웅담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그냥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신뢰 이행입니다.
관료주의: 시스템이 만든 또 다른 전쟁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반부의 팽팽한 전장 서스펜스가 끝나고 영화가 중반으로 넘어가는 순간, 싸움터가 아프가니스탄 황무지에서 미국 관청 전화 연결음으로 바뀝니다. 이 전환이 오히려 더 숨막혔습니다.
존 킨리는 귀환 후 수훈 십자훈장을 받습니다. 수훈 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이란 전투 중 탁월한 영웅적 행동을 보인 군인에게 수여하는 미 육군 최고 수준의 무공훈장 중 하나입니다. 명예는 받았지만, 그를 살려낸 아흐메드는 탈레반 수배자 명단 상위 10위 안에 이름이 올라 가족과 함께 지하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킨리가 아흐메드의 비자 발급을 위해 매달리는 장면은 현실 세계의 이민 행정 절차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미국 이민법 체계에서 SIV(Special Immigrant Visa), 즉 특별이민비자는 미군 작전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인과 통역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입니다. 그러나 2021년 미군 철수 이후 수만 명의 SIV 신청자가 수년째 처리 대기 중인 현실은, 이 영화가 단순한 픽션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제가 컨설팅 현장에서 가장 자주 목격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조직 내부의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 범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킨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듣는 "대기해 주십시오"는, 제가 자문 현장에서 수없이 들었던 "검토 중입니다"와 정확히 같은 소리입니다. 이 장면들이 불편하게 느껴진 건, 그것이 픽션이 아니라 현실의 반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짚는 핵심 구조적 모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SIV 제도는 존재하지만, 평균 처리 기간이 수년을 초과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 수배자 명단에 오른 협력자는 신청 자격이 불분명한 회색 지대에 놓입니다.
- 국가가 활용한 민간인에 대한 보호 의무가 제도적으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 결국 개인(킨리)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민간 보안 계약자까지 고용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미국 정부가 SIV 신청을 처리하지 못해 대기 중인 인원이 2022년 기준 약 7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 바 있습니다.
비자 문제: 후반부 편의주의가 남긴 아쉬움
제 경험상 좋은 영화는 끝까지 자기 논리를 밀고 나갑니다. 가이 리치 더 커버넌트는 3분의 2 지점까지 그 기준을 완벽히 충족시켜 줬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흔들립니다.
듀란타 댐 위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시퀀스는 박진감 면에서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수십 대의 탈레반 차량이 터널을 봉쇄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AC-130 건십(공중 포격기)이 하늘에서 내려와 한 방에 정리해버리는 구조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AC-130 건십(Gunship)이란 수송기 기반의 공중 화력 지원 플랫폼으로, 측면에 장착된 기관포와 곡사포로 광범위한 지상 목표를 제압하는 항공기입니다. 위력 자체는 현실적이지만, 그 타이밍은 각본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더 아쉬운 건 비자 문제의 해결 방식입니다. 영화 전반부에 걸쳐 그토록 두껍게 쌓아올린 관료주의의 벽이, 결말에서는 대령이 서류 한 장을 건네는 장면 하나로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이건 현실에서 절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실제로 비자 관련 행정 절차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봤을 때도, 그 시스템은 한 사람의 결심 한 방으로 뚫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 점에서 이 결말은 영화가 초반부터 쌓아온 사회 비판의 날을 스스로 무디게 만드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또한 배급 단계에서 이 영화에 익스펜더블 4라는 타이틀을 붙인 결정은, 장르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마케팅 오류입니다. 팝콘 무비를 기대한 관객에게 아프가니스탄 통역사의 비자 문제와 전쟁 관료주의를 다루는 하드보일드 전쟁 서사를 보여주는 건,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첫 접점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제이크 질렌할과 다르 살림이라는 두 배우의 절제된 내면 연기, 그리고 가이 리치 특유의 건조한 미장센이 만들어낸 긴장감 덕분에 전반부만큼은 최근 나온 전쟁 드라마 중 가장 밀도 높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편의주의적 결말에 아쉬움이 있어도, 두 사람이 서로를 붙들던 그 눈빛은 오래 남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제 옆 사람에게 신세 진 기억을 떠올렸다면, 이 영화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