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디 아더 미 리뷰 (친화수, 피타고라스, 반전)

by 타임상자 2026. 6. 24.

법이 외면한 피해자를 오래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첫 장면부터 등줄기가 서늘해질 겁니다. 저도 과거 인천 서구에서 재판 조작과 데이터 세탁으로 피해를 입은 소시민을 자문하며, 공권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목격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016년 그리스 범죄 스릴러 영화 <디 아더 미(The Other Me / Heteros Ego)>는 단순한 오락영화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디아더 미, 친화수가 설계한 복수의 구조

이야기는 1987년 그리스의 어느 가정집에서 시작됩니다. 수학자 할아버지가 손녀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오래된 철학자의 펜던트를 선물하는 장면인데, 이 조용한 오프닝이 영화 전체의 암호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 2007년, 스무 살 클리오가 약혼자 토스와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날 뺑소니 사고로 즉사하고, 가해자들은 재판 조작을 통해 전원 무죄 선고를 받습니다. 8년 뒤 철학 교수 디미트리스는 4년 전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뺑소니 범을 쫓으며, 살인사건 수사에 자문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범인은 현장마다 피타고라스의 인용구와 숫자 '220'을 남깁니다. 여기서 피타고라스 인용구란 고대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남긴 철학적 언명으로, 이 영화에서는 '숫자가 곧 정의'라는 범인의 신념을 상징하는 코드로 기능합니다. 디미트리스는 수학자 마르셀 카페 교수를 찾아가 핵심 단서를 해독하는데, 그 열쇠가 바로 친화수(Amicable Numbers)였습니다. 친화수란 두 숫자가 서로 상대방 숫자의 진약수(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되는 쌍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220의 진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284의 진약수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됩니다. 피타고라스는 이 수의 쌍을 "완벽한 우정과 연대"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직접 이 수학적 구조를 따라가 봤는데, 단순한 극적 장치를 넘어 범행의 주기와 피해자 수, 그리고 마지막 묘지 방문 날짜까지 정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살해된 판사, 의사, 변호사는 모두 30여 건에 달하는 재판 조작에 가담한 공모자들이었고, 범인은 법이 결코 완성하지 못한 인과율을 숫자로 직접 설계한 셈입니다. 이러한 플롯 설계는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보기 드문 수학적 내러티브 구조로, 영화적 완성도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핵심 서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87년 펜던트 증여 → 친화수 284의 복선
  • 2007년 클리오 사망 → 재판 조작으로 가해자 전원 무죄
  • 2015년 연쇄 살인 시작 → 2일 간격, 피타고라스 인용구 + 숫자 220
  • 8월 22일 묘지 → 범인 220의 정체 공개

범인이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클리오의 단짝 친구 나디아였다는 반전은, 복수를 감행한 인물이 피해자와 가장 깊은 감정적 유대를 지닌 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반전의 쾌감보다는 슬픔 쪽에 더 가까이 닿아 있었습니다.

반전과 PPL이 남긴 균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냉정하게 짚어야 할 균열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제 경험상 꽤 드문 종류의 몰입 방해를 느꼈습니다. 바로 노드 VPN 광고의 삽입 방식입니다.

PPL(Product Placement)이란 영화나 방송 콘텐츠 속에 특정 브랜드나 제품을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광고 기법입니다. 적절히 사용하면 서사를 해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는 디미트리스가 대학 연구실 노트북으로 단서를 추적하는 긴장된 장면 한가운데에 VPN의 기능과 서버 국가 수까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이 콘셉트(High Concept) 스릴러, 즉 단일하고 강력한 주제의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장르 영화에서 이런 식의 광고 개입은 관객의 심리적 몰입을 순간적으로 끊어버립니다. 철학적 긴장감이 정점을 향해 달리다가 갑자기 상업 유튜브 채널 화면으로 전환되는 듯한 인지적 낙차를 경험하게 됩니다.

나디아의 반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개연성(Plausibility)이란 서사 안에서 인물의 행동이 논리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근거의 총합을 뜻하는데, 영화 초반 소박하고 순진하게 묘사되던 나디아가 정밀한 연쇄 살인마로 돌변하는 과정에 대한 중간 설명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습니다. 반전이 충격보다는 뜬금없음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과 관계의 서사적 밀도와 관련한 연구에서도 반전 구조의 설득력은 복선 배치의 누적 횟수에 비례한다는 분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경찰이 마지막 살인까지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하는 설정이나, 마르셀 교수가 220과 284의 약수 공식을 길게 강의하듯 설명하는 장면도 완급 조절이라는 측면에서 서사의 흐름을 다소 늘어지게 만듭니다. 완급 조절이란 영화에서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조율하는 연출 기술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는 중반부까지 이 리듬이 탄탄하다가 후반부에서 다소 흐트러집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영화를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봅니다. 법망을 빠져나간 권력자들을 피해자 가족이 응원하고, 디미트리스조차 범인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는 심리 묘사는 우리 사회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의 경계를 진지하게 묻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범죄 스릴러 중에서 수학적 알고리즘을 복수의 언어로 사용한 작품은 제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는 거의 없었습니다.

<디 아더 미>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중반부 광고 삽입의 실책과 나디아 반전의 개연성 부족은 분명한 흠결입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와 친화수라는 고대 수학의 언어로 법이 외면한 정의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요즘 쏟아지는 자극적 스릴러들 사이에서 묵직하게 다릅니다. 과거 사법 시스템의 실패를 가까이서 목격했던 저로서는 디미트리스의 마지막 눈빛이 단순한 결말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으로 읽혔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주말 밤, 지치고 냉소적인 이성에 조용히 불을 지피고 싶다면 이 영화를 권합니다.


참고: https://youtu.be/dW64hSLoHGQ?si=VLwCWl46UWJTkx4I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